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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우리는 왜 그냥 즐기지 못할까?후기/책 후기 2026. 9. 5.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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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그냥 즐기지 못할까 - 교보문고
세상의 모든 행위는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돈과 명예를 위해 행동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 행동하는 모습은 요즘 시대엔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에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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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에서 읽음
- 순수이성비판: 자연이라는 대상이 어째서 인간에 의해 규칙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가? (= 인지능력에 대한 설명)
- 실천이성비판: 마음속에 선의 이미지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고 싶다고 의욕하는 경우가 무엇인가?
- 판단력비판: 여기서 다루는 내용
비판하지 않고는 못사는 임마누엘 칸트씨의 판단력비판을 기반으로 쾌에 대한 내용을 알려주는 책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단순히 좋아서하는 행동들을 하면 분명 목적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칸트는 쾌의 대상을 네 가지 종류로 쾌적한 것,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 좋은(선한) 것중 하나에 속한다고 정의하고 책에서 설명해나간다.
먼저 쾌적한 것은 향유의 쾌라고 부르는데, '목적과 수단이 없는 상태로 누리는 만족감'을 뜻한다. 예를 들어 담배와 같은 기호품이 될 수도 있고, 나 같은 경우엔 커피라고 할 수 있는데, 향유의 쾌는 저차적 감정능력이다. 나머지 아름다움, 숭고함, 선함은 고차적 감정능력이다.
아래 내용을 읽어보며 칸트씨의 판단력비판을 이해해보자
1. 선에 대하여 (좋음에 대하여)
선이 왜 쾌와 관련이 있을까? 칸트씨도 선과 쾌를 논하기 전에 선이라는 독립적인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도덕적이다'라는 정의를 수단과 목적 없이 남을 도와주는 것이어야한다고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라는 말을 하면서 남에게 친절한 사람은 도덕적인가?
칸트는 기분이 좋아지는 동기에 의해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도덕적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저차적 감정능력에 해당하는데, 그러면 저차적 감정능력이란 무엇일까?
저차적 감정능력이면 어떤 동기에 자극받아서 하는 저차적 욕구능력에 해당한다.
고차적 감정능력이란 '이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형식인데, '이것은 선이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런 형식에 따라 행동할 때 그 사람은 도덕적이며, 고차적 욕구능력을 실현하고 있다고 한다.
칸트는 이 형식을 정언명법이라고 불렀다.
정언은 가언이 아니라는 말이며, 가언이라는 말은 '이러저러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 다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라는 것은 친절하면~이라는 조건이 들어가기 때문에 정언명법이 아니다.
다시 선에 대해 돌아가보자. 선은 고차적 감정능력에 대해 해당하기 때문에 인간은 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실로서 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는 이걸 이성의 사실이라고 부르며, 실천이성이 명령하는 무조건적인 도덕 법칙이다. 인간에게는 도덕적 관념이 이미 주어져있다고 한다.
그래서 선은 실천이성이 명령하는 무조건적인 도덕법칙이라는데 실천이성이 무엇인가?
실천이성이란 감각적 욕구와 충동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세우고 행동하는 이성의 능력이다.
도덕법칙이 무엇인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명령으로 조건 없이 무조건 해야한다고 지시하는 무조건적인 행동 규범이다.
그러니까 선이란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정해져있는 답이다.
참고로 실천이성의 관점에서 객관적 대상은 선과 악 두가지 밖에 없다.
- 선: 도덕법칙이 명하는 바와 일치함
- 악: 도덕법칙이 명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음
2. 아름다움에 대하여
장미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우리가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조건이라는 것을 어릴 때 배워서 장미가 아름다움의 조건에 맞아서 판단하는게 아니다.
그럼 왜 우리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알고 있고,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칸트의 판단력비판은 개인적인 판단(저차원)을 넘어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판단하는 사회적 보편성(고차원)을 요구하는데까지의 구조를 밝혀내려했다. (보편성 = 모든 사람의 동의를 요구하지 않음)
칸트는 인간의 마음을 감성, 구상력, 지성, 이성이라는 네 가지 행위자가 일하는 회사와 같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이중에 구상력과 지성과 관련이 있다.
- 구상력: 상상력과 비슷하다. 눈앞에 현전하지 않아도 그 대상을 직관하는 능력이다.
- 지성: 이해력과 비슷하다. 개념적 사고를 담당하는데, 개념적 사고란 대상을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것이고, 개념이란 어떠한 규칙성을 찾아낸다는 의미다. (지성 = 개념적 사고 담당 = 대상을 어떠한 규칙성으로 파악한다)
경험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실제의 경험 그대로보다는 개념(규칙성)에 잘 들어맞는 것으로 바꿔야한다.
현실 세계는 너무 복잡한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인과관계라는 개념에 적용하기 위해 어떠한 형식화가 필요하다
이런 형식화를 '도식화'라고 해서 칸트는 구상력이 도식화를 담당한다고 한다.
구상력은 눈 앞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작용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틀을 매번 만들어낼 수 있다.
구상력은 지성이 현실의 이미지를 잘 다룰 수 있도록 지성을 고려하면서 도식화라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게 왜 아름다움과 상관이 있을까?
회사에서 발표를 하게 된다면 PPT는 구상력이 되고, 발표하는 것은 지성이 될 것으로 구상력은 지성을 서포트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지성과 구상력의 관계과 뒤바뀌는 경우가 존재하는데, 이것이 아름다움에 해당한다.
구상력은 지성을 고려하면서 도식화라는 작업을 하는데, 구상력이 개념 없이 도식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지성이 개념을 전제하지 않았는데도 규칙성을 발견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장미를 아름답다고 하듯이 대상에서 규칙성을 발견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규칙이 없었는데도 마치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마땅히 그래야 한다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룸다움이란 규칙이 없는데 규칙적인 것, 개념 없이 필연성을 느끼게 하는 것을 가르킨다. 칸트는 이걸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부른다.
3. 숭고에 대하여
제대로 알려주는게 없는 칸트씨는 숭고만큼은 제대로 정의해줬다. 숭고란 우리를 압도하는 엄청난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ex. 대자연)
엄청난 것에 압도당한다면 그것은 불쾌감인데, 그 불쾌감이 어느새 불가사의한 만족감으로 이어진다면 그게 숭고라고 한다.
엄청난 것에 압도당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인간의 인식 용량을 훨씬 넘어갔다는 것인데 왜 최종적으로 쾌에 속하는 숭고가 될까? 인간은 압도적인걸 경험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힘을 깨닫게 되어 인간의 마음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쾌로 전환된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논할 때 칸트가 네 가지 행위자(감성, 구상력, 지성, 이성)가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구상력과 이성이 담당한다.
- 이성: 이념을 다룰 수 있는 능력. 이념이란 인식할 수 없지만 생각할 수는 있는 대상을 다루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를 생각하는 것은 구상력이고, 우주 전체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게 구상력의 한계이지만, 우주 전체라는 이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건 이성이다.
이성은 이념을 구상력에게 들이대면서 이 엄청난 것의 전체를 파악하라고 압박을 가하는데, 구상력은 이런 이념에 걸맞게 스스로를 높이기로 결심한다. 이것을 칸트는 '법칙으로서의 이념과의 적합을 실현해야 한다는 자신의 사명'을 구상력이 재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엄청난 풍경 자체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풍경에 압도당하는 불쾌한 경험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이 숭고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인간성은 도덕성을 포함하고 있고, 인간이 이미 갖추고 있던 자신들의 마땅한 본모습을 재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숭고 역시 아름다움처럼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성-구상력은 지성-구성력처럼 깔끔한 합목적성이 아닌 모순을 품은 합목적성이다.
4. 네 가지 쾌의 관계

위에서 언급된 내용은 1번, 2번, 4번인데, 3번에 대한 내용은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3번 영역은 목적과 수단이 들어가는 행동으로 칸트 입장에서 윤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뜻한다. 참고로 윤리적이지 않다는 이분법적 사고의 부정어가 아닌 윤리를 판단할 가치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3번 영역과 4번 영역은 잘 구별이 안될 수도 있는데 아래의 예시로 설명할 수 있다.
- 휴식을 취하기 위해 와인을 마신다 = 휴식을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와인을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3번 영역
- 와인을 좋아해서 마신다 = 목적과 수단이 없으므로 향유의 쾌에 속하니 4번 영역
그래서 3번 영역은 다른 1번, 2번, 4번 영역과 다르게 수단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칸트는 이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하며, 어떤 것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1번, 2번, 4번 영역은 '직접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한다.
5. 향유하는 쾌의 소멸
향유의 쾌(4번 영역)는 언제든지 3번 영역(목적-수단이 연계된 간접적으로 좋은 것)에 잡아먹힐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만약 향유의 쾌에 익숙하지 않으면 4번 영역은 쉽게 소멸되어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는 향유의 쾌를 박탈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직장생활을 버티기 위해 술을 마신다', '상급지로 가기 위해 부동산 공부를 한다', '더 행복한 노후를 꿈꾸기 위해 연금을 공부한다', ... 처럼 더이상 향유할 수 없는 목적에 사로잡힌 삶을 만들고 있다.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라는 판단에는 사람마다 고유한 취미가 있기 때문에 보편성이 전혀 없는데, 이런 사람은 향유의 쾌를 받아들이는 법을 아는 인간이다. 자기만의 취미를 가진 인간은 모든 것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병적인 일상에서 빠져나와 쾌적한 것을 향유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반대로 칸트는 향유의 쾌를 받아들이는 법을 모르는 인간은 계속 병적인 존재로 남는다고 한다. 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단을 그저 목적 달성을 위해서만 계속 쫓게되는 것이다. 향유의 쾌가 박탈되는 일에는 개개인이 겪는 가혹한 일상이 원인인데, 향유의 쾌를 박탈 당했을 때 되찾을 수 있는 처방전이 없다. 그래서 인간의 삶 전부를 목적-수단의 연계에 종속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향유의 쾌를 지켜내야 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오게된 문제는 보편성이 생기고 있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나에게 주는 선물, 문화산업이다.
나에게 주는 선물은 대표적으로 3번 영역이 4번 영역을 잡아먹은 것이다. 사치품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목적으로 사치품을 산다는 수단이 된 것이다. 나만의 선택이라는 착각에 빠져 실제로는 산업이 정한 대로 획일화된 가짜 자율성을 기반으로 사치품을 사게 된다.
문화산업은 영화, 음악, 광고등 문화를 표준화 시켜 사람들의 감각적 취향을 획일화, 규격화 시켜버려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겉으로는 각자의 쾌적함처럼 보이지만, 강제적인 가짜 보편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쾌적한 것'에 대해 똑같은 비보편적이며 개별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 사태가 찾아왔다.
즉, 나에게만 쾌적하다는 사적 목적 형태를 취하는 것 같지만, 원래대로라면 제각각인 향유의 쾌가 대중 전체에 걸쳐서 똑같아진 것이다.
그동안 다른 책을 읽을 때는 메모장이나 하이라이트만 하고 넘어가는데, 프로비판러 칸트씨 책을 읽으니 정리 없이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워 블로그에 정리하면서 썼다.
책 내용은 짧지만 당연한 것에 대한 의문문에서 시작해 생각이 확장된다는 느낌을 받으며, 우리 사회에 목적-수단을 강요하는 사회, 사라지고 있는 향유의 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 향유의 쾌에 속하는게 무엇이 있을까
나의 대표적인 향유의 쾌는 커피인데, 커피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보편성이 없는 향유의 쾌를 가지고 있는가?
수단-목적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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